자크타티의 플레이타임(1967)을 스크린에서 처음 보았는데 역시나 스크린에서 보니 완전히 다르게 다가왔다. 박람회장에서 무소음문을 파는 회사 사장은 미스 반 데로에를 희화화한건가 생각된다. 독일이 시작하고 미국이 주도하던 모더니즘이 싫은 프랑스인의 시선이랄까? 영화 촬영장 세트나 촬영 기록이 상세하게 남아있지 않아서 아쉽다. 언젠가 70mm 필름 상영을 꼭 보고싶어진다.
사카구치 교헤(1978~) 80년대 버블다운후 1992년부터 2012년 까지 잃어버린 10년(20년) 기간동안 사회에 나온 세대, 지표로 삼을 만한 건축가.
바로 위 소우 후지모토(1971~)에 비해 7살어리만 굉장히 커리어가 다르다. 사실 후지모토도 버블다운시절 30대를 보냈으니 그의 윗대에 비해서도 작품수가 훨씬 적다. 니시자와 류에(1966~)는 윗세대들의 지원이 있었기에 겨우 살아남은 굉장히 예외적인 케이스.
건축,주거공간을 작동시키는 보이지 않는 부조리한 사회시스템을 정치 활동,환경 운동을 의태하여 수면위로 끌어올린 그의 시도는 대안적 건축가상,주거공간을 제시했다. '0엔 하우스'는 어떻게 보면 사회적 행위를 통해 그가 제시하는 조각품적 성격으로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사카구치 쿄헤이의 건축,도시,공간에서 공동체, 휴머니티를 다시 회복하려는 계획은 2013년 신정부 활동 종료선언으로 힘을 잃었다. 2011년 도호쿠 대지진 이후 일본사회가 급격히 보수화 되면서 동료,지지세력을 확보하지 못한것이 실패의 원인인것같다. 최근 생각나 찾아본 그의 모습은 상당히 지치고 모든걸 내려놓은것 같아 안타까웠다.
사실 사카구치 쿄헤이도 이런 대안적 건축을 통해 건축가로서 나아가려 했을것이다. 하지만 일본사회,경제는 그를 받아주지 않았다. (그의 활동을 바탕으로 '0엔 하우스'가 스터디 모델이 되어 공동주거를 설계했다면, 또 건축으로 구현이 되었다면 어땠을까?)
일본의 90년대 후반,2000년대 초반의 상황을 목전에 둔 2020년 대한민국. 90년대,00년대생 중에 사카구치 교헤이에 상응하는 건축가가 나올까? 나온다면 어떻게 다를까? 한국에서는 그에 상응하는 실험이 성공할수있을까? 내가 학생때 광주비엔나레에 와서 프로그램도 운영하고 했었는데 직접가지 못한게 지금 후회된다. 자료도 별로 없다. 그 당시 한국에서는 별 반향이 없었다.
요즘 한.일관계가 안좋다지만, 한국인과 일본인은 이런면에선 거의 차이가 없다. 우리가 일본에게서 배운건가? 이 지긋지긋한 학벌, 계보주의. 오히려 일본건축계에서 안도 타다오를 미워할수록 후세에 안도 타다오는 더욱 빛날것이다. 아직 일본 건축계에서 따로 떨어져있는 안도 타다오, 누가 그의 방법을 이어서 아시아에서 진일보 시킬까?
미국의 건축비평가 Martin Filler가 밝히는 프리츠커 수상 스토리의 비화
1993년 당시 프리츠커 심사위원이었던 프랭크게리와 리카르도 레고레타가 안도 타다오의 작품에 관심을 갖고 실제로 보고싶다고 하자, 일본건축계에서 압력을 넣었다는것. 단게 겐조 다음에 수상할 사람은 안도 타다오가 아니라 마키 후미히코라고(그렇지 않으면 외교적 결례라나?). 결국 93년은 마키 후미히코, 3년뒤 95년 수상한 안도 타다오.
마키 후미히코는 반드시 댓가를 치를꺼다. 바로 위 단게 겐조도 만만치 않게 제국주의자 였구만. 게리 입장에선 황당했을듯. 생각해보니 그래서 게리가 일본에 주요 프로젝트가 없는 이유이기도 한듯. 게리 다음에 타겟삼은게 자하 하디드. 미움 받는것도 역사적 계보가 있다?!
이 지점에서 슬퍼지는건 옆나라 오세훈 시장이 주도한 DDP현상설계 스토리.......자하 하디드의 대표작은 서울에(한국 건축계의 온갖 방해와 비난에도 불구하고)
'According to Gehry's account at the time, he and the Mexican architect Ricardo Legorreta (a Pritzker juror from 1985 to 1993) had asked their local hosts to arrange for them to see the buildings of Tadao Ando, based in nearby Osaka and beginning to be touted as his country's most promising younger architect for works such as his powerful Cavern of the Light of 1987-89 in Ibaraki. The Japanese demurred, explaining that by right of seniority, the next Japanese recipient after Tange would have to be Fumihiko Maki (a well-connected modernist who was a Pritzker juror from 1985 to 1988), and only after Maki could the junior Ando even be considered. To do otherwise, they implied, would be a fatal diplomatic gaffe. And this is precisely what happened when Maki was chosen in 1993, and Ando followed him in 1995, both during Gehry's two-year tenure as a juror.'